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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피아노, 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 두 악기 영화 본문

영화

그랜드 피아노, 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 두 악기 영화

Johnny_C 2014. 4. 30. 00:00

둘 다 본지 일주일 전후쯤 됐는데 밀려 쓴다.

역시 남주가 특정 상황에 묶였다는 <그랜드 피아노>에선 프로도가 셀즈닉으로 나오는데, 원래 피아노도 쳤나 보다. 원래 연주자가 아닌 배우가 이렇게 연주하는 걸 작품에서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마냥 좋다. 그리고 셀즈닉이라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고전 명화들에 히치콕과도 연결되는 그 이름부터 당연히 떠오르는데, 고전색이 강하면서도 재미도 겸비하고자 한 이런 스릴러에 저런 배역 이름은 아마 일부러 의미를 담았던 것 같다. 음악 영화라서도 그렇지만 영화 자체도 예술적이었다. 시카고와 바르셀로나 합작이라 할리우드 스타일은 아니었다.

오프닝 시퀀스부터가 인상적이었다. 피아노에 톱니 등 기계적 장치로 특정 음의 배열이 연주되어야 뭔가 풀리도록 설치해뒀다. 원래 싸이코 같은 역도 예부터 썩 잘 어울렸던 존 쿠삭은 완벽한 예술에 집착해서 주인공을 트라우마에 빠지게 한 바로 그 곡을 연주하게 했는데 막상 주인공은 그동안 다른 작곡가든 스승이든 꼭두각시처럼 완벽해지려고만 했던 예전과 달리 일부러 마지막 음을 틀려버렸는데, 글쎄, 완벽에 대한 협박범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어서였을 뿐일까? 그렇지만은 않았을 거다.

그는 가족보다 음악을 더 아꼈던 스승과, 주목받고 싶었던 마음의 부담이 실수로 이어진 트라우마로부터, 연주를 통해 스스로 극복하고 벗어난 것 같았다. 연주하면서 그가 깨달음을 얻어 스승과 달리 완벽한 음악보다도 가족을 진정 사랑하게 된, 그래서 음악은 틀리고 아내에게 시선을 돌려 진정으로 감사를 표할 수 있게 된 거라고 보고 싶다. 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웃기게도, 그렇게 확연히 드러나는 음을 일부러 틀렸어도 청중들이 모를 거란 걸 알고 있었단 거였다. 멍하니 한 사람이 손뼉치기 시작하자 다들 쳐대는 광경이란. 이런 풍자도 잘 담겼다.

왠지 라흐마니노프 3번이 떠오르기는 했는데, 이 영화에 연주된 협주곡과 독주곡은 둘 다 모르는 곡이었고, 영화 때문에 만든 곡인지 원래 있던 곡인지도 모르겠지만, 협주곡 중반에 대화가 이어지면서 연주를 하던 부분과 독주곡 시작할 때 롱테이크는 어디서 실수하진 않으려나 바짝 긴장하게 했다. 마지막에 망가진 피아노를 보고 열쇠가 진짜 있나 확인해 보는데, 아마 스위스 은행에 그 자산은 스승의 것이었을 듯. 돈에 관심을 가져 무대에서 열쇠를 얻었을 것보다는, 진짜 자신을 발견하고 집에 갈 아내와 함께인 다음 혹시나 확인차 열쇠를 꺼낸 마무리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진정한 자신에게 스스로 주는 선물과 같았다. 건반이란 키에 하나 부족했던 키, 그건 어쩌면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하나씩 다 숨어있는 게 아닐까?

 

<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도 연주자 겸 연기자가 주연인데 악기는 당연히 다르고 위에서는 연기자가 연주도 하는 거였다면 여기선 연기도 하는 연주자가 하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대단한 연기를 기대하지 않고 봤음에도 재미는 없었다. 초점을 파가니니의 순정에 뒀다는 건 알겠는데, 그 대상녀 메이드가 그나마 눈에 띄긴 했으나 구성이 늘어지고 특별한 게 없었다. 남주 데이비드 가렛은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특화되지 않은 예술인이라 먼 미래엔 대성할 걸 기대하고 응원한다. 연주를 카메라 덕분에 아주 가까이서 여러 차례 볼 수 있었던 걸로 만족해야 했다. 남독일계와 이탈리아 합작인데 런던은 세트인 거 같았다. 진짜 런던은 그렇게 희뿌연 연기로 뒤덮이진 않았다.

'파가니니'는 생각보다 더 옛날 사람이다. 낭만주의로 알려져 19세기 한창때 태어난 사람으로 대충 생각할만했는데, 내 CD들을 한번은 작곡가 생일 순으로 정리할 때 보니 생각보다 좀 꽤 앞에 있는 거였다. 무려 베토벤 바로 뒤에 어정쩡하게 끼어있어서 그 사이만 여유 공간을 좀 벌려뒀을 정도로 그는 음악사 전체에서도 파격의 선두에 있다. 물론 19세기 초반에 삶이 걸쳐있긴 하지만, 요즘 띠동갑 아이돌만 상대로도 삼촌팬 소릴 듣는데 수십 년의 예상 오차는 작은 차이가 아니다.

악마설은 아마도 아직 종교의 대중 콘트롤이 강하고자 했던 시절에, 예를 들어 바흐의 세속 칸타타 같은 건 소소한 주변적 즐거움일 뿐으로 희화하는 듯한 정도에 그쳤는데, 이 파가니니는 신이며 후세가 다 뭐냐 인간 현세 중심 즐겁자 주의라서, 그에게 악마설을 입힌 건 가톨릭의 음모였을 거다. 현대에도 찌라시라는 작은 씨앗이 퍼지면서 확대되듯이, 악마는 파가니니가 아니라 도리어 그를 둘러싼 매니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뜻해야 옳지 않을까? 요즘으로 치면 레이디 가가가 아니었을까 싶다. 악마설은 역사 속에나 접어두고 오로지 음악으로만 접해본다면 색다른 즐거움을 넘어 자신이 인간임에 감사하는 은근한 사람냄새도 맡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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