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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훈 서울시향 우리동네 음악회 본문
처음엔 꺼렸다
구청 홈페이지에서 약 한 주 전부터 선착순으로 예약접수를 한 '우리동네 음악회'에 다녀왔다. 정명훈 선생님이 서울시향과 요즘 이러고(!) 다닌다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무료라니 웬지 개나 소나 와서 방해나 되고 되려 짜증만 나서 돌아가게 될까 (막상 나도 개나 소 중 하나면서) 우려도 됐고, 프로그램은 전곡 연주 없이 두 곡 중 연결되지 않는 악장 셋뿐이라 아쉬움도 들었고, 후원이 교회길래 선교 활동도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 등 때문에 조금은 꺼렸다.
마음을 고쳐먹고
하지만 막상 시일이 다가오자 '아, 과연 어떨까?' 하는 마음이 참을 수 없는 정도를 넘어 완전히 들떠 있었다. 올봄엔 오랜 세월 함께 한 워크맨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고 며칠 전인 광복절 전야에는 이미 한 번 고쳤던 헤드폰마저 고장 나 버리는 등 작년에 이어 개인 음악사에 악재가 연발하던 중이어서 비싼 음악회도 참고 있었는데 이를 쇄신할 좋은 계기가 저절로 찾아온 것도 같았다. 단 한 악장만이라도 이렇게 훌륭한 음악가분들이 오시는데 감지덕지 아니냐 점점 여기게 됐고, 청중 매너도, 아무리 비싼 음악회라도 비매너 조금씩은 꼭 있는 걸 떠올려보면, 예상보다는 훨씬 좋았다. 더불어 '야, 역시 우리 문화 동네 수준 꽤 괜찮네.' 하는 뿌듯함도! 또 동네에서 정해진 공연장도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건물이라 괜찮았다. 위층에 자리 잡고 조감하며 비교적 평온히 감상할 수 있었다. 마음가짐을 고쳐먹어 편안했으니 연주도 제대로 즐길 수 있었다.
프로그램은 왜
구성은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과 말러 교향곡 9번에서 1악장과 3악장이었는데, 멘델스존은 고전주의 완성을 뒤로하고 낭만주의를 여는 시점에 있었으니 절정의 무더위를 보내며 가을을 여는 이 계절 타이밍이 잘 들어맞아서 넣었다고 보더라도, 말러 9번은 왜 하필 그 곡을 넣은 건지 처음엔 통 알 수가 없었다. 친숙하게 다가가는 분위기여야 할 동네 음악회에 난해한 곡은 어울리지 않잖은가? 그런데 연주를 다 마쳤을 때 "여러분은 햅쌀과 같은 곡을 들으셨습니다." 이런 멘트가 있길래 말러더러 햅쌀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했더니 바로 이어지는 말이 그 다음 날(29일) 그라모폰과 녹음을 한다는 거였다.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물론 지금으로부터 몇 시간 전에 녹음을 마쳤을 예술의 전당에서는 전곡을 연주했겠지만, 녹음할 걸 연습도 하면서 시민들에 들려도 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최근 말러 붐인데 덕분에 개인 나도(소보단 개) 말러 입문했다.
정명훈의 오늘
전곡을 들은 것도 아니라 감상까지 적긴 그래도 좀 적어보자면, 두 곡으로라도 본 현재의 정명훈은 특이한 유별남 없이 적정선에 서 있다고 느꼈다. 솔직히 난 근 몇 년 '혹시 마음이 어디 다치신 건 아닌가?' 조금 수상하게 봤었다. 드러낼 수 없는 어떤 이유로 국내에 비교적 조용히 계신 건지, 아니면 정말 순수한 의도에서 후진 양성 등 다른 활동들을 하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번 일주일 동안 생각하기엔 또 혹시 음악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힘들어하셔서 말러 9번으로 슬슬 마무리 찍으시려는 건가 조금 걱정도 됐었다. 그런데 이날 본 그분의 자세와 표정 그리고 몸짓으로 나오는 음악에서 모난 곳은 다행히 없었다.
비교 감상
말러 9번은 제임스 레바인 - 필라델피아 음반으로 들을 땐 워낙 모르고 들어서 그랬는진 몰라도 고루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 정명훈 - 서울시향은 저절로 내 인상이 찌푸려졌는지도 모르도록 깊은 어둠을 깔면서도 또 어떨 때엔 아름다움으로마저 승화해내는 느낌도 받았다. 결국엔 행복이 넘치는 묘한 뒤섞임이었다. 말러가 이랬는데 하물며 먼저 했던 멘델스존 1악장은 곡 자체가 이미 아름다운데 어땠겠는가? 내가 들어본 중에서, 하이페츠의 속도감과 잘 맞췄지만 화려함에만 쏠려 듣게 된다는 아쉬움이 있는 59년 샤를 뮌쉬 - 보스턴, 80년 어린 무터의 담백함이 살아있지만 이를 토닥거리느라 조금은 과하다 싶었던 무게감이 있던 카라얀 - 베를린 필 음반, 81년 정경화 악바리 같았던 시절에 샤를 뒤투아 - 몬트리올, 그 어느 연주보다 편안했다. 바이올린 협연자는 스베틀린 루세브였는데 정명훈 - 서울시향과 이렇게 호흡 좋게 잘 해줬고, 여기가 서울이라서인지 너무 '정명훈 바라기'처럼만 소개가 됐던데 본인도 알아들었을런지는 모르겠다. 몇 시간 전 녹음했을 정명훈 - 서울 필 말러 9번 2013년 그라모폰 음반을 훗날 내 자식이 손꼽히는 명반 중 하나라며 내게 들고 올 수 있게 했을 거라고 믿는다. 그때 난 "이 아빠가 이거 녹음하기 하루 전에 동네에서 조금 먼저 듣고 참 행복했었단다."라고 미소 지으며 말할 수 있길 바란다.
맺으며
라이브가 워낙 오랜만이라서일까? 대만족이었다! 이 행복의 긴 여운과 함께 올가을을 맞이한다.^^